# 동유럽여행5국#자그래브#자그레브
헝가리의 다뉴브 강변 풍경과 작별하고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향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느끼는 유럽의 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같은 대륙 안에서도 이렇게 다른 문화와 역사의 층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놀랍다.
자그레브 대성당: 불멸의 신앙이 새겨진 돌의 서사시
자그레브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105m 높이의 쌍둥이 첨탑. 자그레브 대성당(Zagreb Cathedral)은 그야말로 이 도시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보수공사로 인해 비계가 둘러쳐진 모습이 다소 아쉬웠다.





천년을 견뎌낸 석조 조각의 비밀
대성당 외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놀라운 발견들이 숨어있었다. 정문 주변의 팀파눔(Tympanum, 반원형 장식부)에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 장면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모를 떠받치고 있는 **천사들의 날개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표현된 깃털 조각**이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기둥머리(capital)에 새겨진 동물 조각들이었다. **사자, 독수리, 황소, 그리고 천사의 얼굴**이 각각의 기둥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성경의 사복음서 저자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태오(천사), 마르코(사자), 루카(황소), 요한(독수리)을 나타내는 중세 기독교 미술의 전형적인 도상학이 여기서도 발견된 것이다.


화염 속에서도 타지 않은 기적의 성화
17세기에 성당은 화재로 인해 몇 차례나 훼손되었으나, 그때마다 이뤄진 재건축으로 성당의 내부는 가치 있는 물품으로 채워지며 매번 그 격을 더 높여갔다는 역사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수차례의 화재 속에서도 주제단에 걸린 **성모승천 성화가 기적적으로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주변의 모든 것이 재가 되었지만 이 그림만은 화염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이를 성모 마리아의 기적으로 믿고 있다.

성마르코교회: 중세 장인정신의 극치
자그레브 구시가지 한복판에 자리한 성마르코교회(St. Mark's Church)는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지붕의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지붕에 숨겨진 역사의 암호
교회 지붕의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왼쪽 문장은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의 세 지역(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을, 오른쪽은 자그레브 시의 문장을 나타낸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서도 크로아티아인들의 통합 의지를 잃지 않았다**는 상징적 메시지였다.

부조에 새겨진 성서의 인물들
교회 정면 포털의 부조 작품들을 면밀히 관찰해보니 놀라운 세부사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의 12제자들이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특히 베드로는 열쇠를 쥐고 있고, 요한은 젊은 모습으로,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팀파눔의 조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구원받는 자들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표현되어 있었는데, 천국으로 향하는 이들의 평화로운 표정과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들의 절망적인 모습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중세 조각가들의 기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 카타리나 교회: 바로크 예술의 화려한 향연
17세기 초 예수회(Jesuit)에 의해 건립된 성 카타리나 교회는 자그레브에서 바로크 양식의 백미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화려하고 감성적인 예술을 통해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천장 프레스코의 숨겨진 이야기
교회 내부로 들어서자 천장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가 압도적이었다. **성 카타리나의 순교 장면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들은 단순히 종교적 주제만을 다룬 것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당시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의식이 은밀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특히 천사들의 의복 색깔이 **크로아티아 국기의 적백청 삼색**으로 칠해져 있어, 종교적 경건함 속에서도 민족적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당시 화가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제단의 조각상들이 말하는 것
주제단을 장식한 조각상들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좌우에 배치된 크로아티아의 수호성인들**이었다. 성 스테파노와 성 라디슬라오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손과 발가락, 심지어 의복의 주름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의 발견
자그레브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가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1355년에 개업한 '그라드스카 약국'(Gradska Ljekarna)**이었다. 이곳은 현재도 운영 중인 약국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국 내부에는 중세시대부터 사용해온 **도자기 약병들과 황동으로 만든 저울, 유리로 된 증류기**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라틴어로 쓰인 약품 라벨들이 인상적이었는데, 'Aqua Vitae'(생명의 물), 'Theriacum'(만병통치약) 같은 중세 의학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의약품부터 전통 허브 치료제까지 판매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자그레브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반옐라치치 광장: 살아 숨쉬는 역사의 무대
구시가지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반옐라치치 광장이었다. 19세기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 요시프 옐라치치 백작의 이름을 딴 이 광장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크로아티아 근현대사의 핵심 무대였다.
광장 건물들의 숨은 이야기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각각이 모두 다른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세세션 양식부터 유고슬라비아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독립 이후의 현대적 복원까지, 마치 건축사 박물관을 보는 듯했다.
특히 광장 북쪽의 **붉은 지붕 건물군들은 모두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들**로, 당시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들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카페나 상점으로 개조되었지만, 건물 곳곳에 남아있는 가문의 문장이나 장식 조각들에서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자의 단상
자그레브에서의 하루는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 같았다. 11세기부터 21세기까지, 천년의 시간이 한 도시 안에 층층이 쌓여있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외침과 지배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술과 건축을 통해 끈질기게 지켜왔다**는 점이었다. 성마르코교회의 국기 색깔 천사들, 성 카타리나 교회의 민족 성인들, 그리고 대성당의 기적적인 성화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그라드스카 약국의 존재는, 자그레브라는 도시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살아있는 역사임을 보여주었다.
내일은 어떤 놀라운 발견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크로아티아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그레브대성당#성마르코교회









